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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징기스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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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북방의 패자들은 그 발상지가 어디든 몽골 초원을 기반으로 중국과 대립하였는데,

그 싸움에서 패배하여 서역으로 쫓겨 난 세력들이 유럽이나 중동지역에서 친 난리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을 장악하거나 지배하는 자가,  세계사 대부분의 시간 동안,  최강의 무력을 보유한 최강자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몽골은 원래 초원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시베리아 삼림에서 살다가 초원이 정착한 한 가난한 부족의 이름이었다고 하는데,

이 별 볼일 없는 집단을 이루는 씨족들 중에서도 유난히 찌질했던 보르지킨 씨족에서 출현했던 한 사내가 초원을 통합하면서

지 멋대로 살아가던 각 부족들을 하나의 문화 공동체로 묶었고, 이들이 세계를 정복하는 바람에,

몽골이 초원 전체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고 초원의 각 부족들 내지 민족들은 몽땅 몽골족이 되었다 한다.

나중에 징기스칸이라는 공포와 위대가 혼재하는 이름을 남긴,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강자 테무진은, 우리 나라에서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몇 년 전,  금나라가 몽골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일찍 죽는 바람에 단지 아홉에 불과한 식구들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고 한다.

노예로 전락했다가 탈출하기도 했고, 아내를 뺏았기고 이리저리 쫒기기도 하였는데,

어찌 어찌 세력을 얻어 마누라를 되찾고 보니 그녀는 이미 다른 놈의 씨를 임신하고 있었다고 한다....음...

이때 얻은 아들이 나중에 러시아와 유럽의 정복자가 되는 바투의 아버지 주치이다.

징기스칸이 몽골 초원의 지배자가 되는 과정을 보면 자신의 능력도 대단했지만 운이 따른 면도 많은데,

운이 없는 성공은 없으므로 그 또한 실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과정이야 어떻든, 평생의 지기이자 후원자였으며 실질적 상급자였던 의형제 자무카와, 오랫동안 보호자 역할을 해 준 옹칸을 누른 테무진은,

최 충헌이 희종에게 은문상국으로 불리며 막부체제를 왕성해 가던 1206년,

쿠릴타이에서 징기스칸으로 추대되었는데,

100만 명 정도의 인구에 2000만 마리 정도의 가축을 보유한, 작고 가난한  이 나라의 이름은 예케 몽골 울루스(큰 몽골 나라)였다.

그는 부족 간 납치와 몽골인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시키고 법치를 강조했으며, 완전하고 전면적인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고,

시베리아 부족과 위구르족까지 친족 관계를 확대하여 부족이나 민족 전체 단위로 가족적 유대를 맺는 정책을 확립하였는데,

이렇게 내정을 다진 그는 다음 해부터 서하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최 충헌이 희종을 쫓아낸 1211년부터 금나라에 여러 차례 침입하였다..

몽골 초원이 이렇게 성장하자 남송은 금을 없앨 최적의 기회로 생각하고 징기스칸을 지원하였는데,

제 딴에는 전가의 보도 이이제이를 시전하여 양패구상을 노린 것이었겠지만,

징기스칸은 금과 싸우다 말고 서역으로 정벌을 떠나 중앙아시아의 호라즘 왕조를 박살내는가 하면, 머나먼 러시아를 공격하기도 하며 송의 애를 애태웠다,

그동안 송을 착실히 뜯어먹던 서하를 공격한 것은 통쾌하고도 고마운 일이었을 것이나,

서하가 너무도 무력하게 몽골의 속국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나중에 늑대를 쫓으려다 호랑이를 불러들였다는 한탄을 하게 되었다.

징기스칸은 탄탄한 몸집에 키가 크고 고양이 눈을 가졌으며 노년에도 흰 머리가 없었고 성욕이 대단했다고 하는데,

천재형의 군사전략가라기 보다는 걸출한 정치가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던 듯하다.

그는 세력이 보잘 것 없었을 때부터 신분을 따지지 않았고, 공평분배를 실시하여 인심을 얻었다 하는데, 

이러한 남다른 그의 성품이 거듭된 패배에도 불구하고 권토중래할 수 있는 정치적 자산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칸이 된 후에도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발탁하였으며,

고아나 과부등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복지시스템을 도입하였는데,

전리품을 나눌 때도 매우 공평하여 부하들의 지극한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한다.

지금까지 본적이 없었던 평등 복지 사회에 초원의 사람들이야 당연히 열광하였을 것이나,

이러한 사회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였을 것인데,

아무리 뛰어난 정치가라 하더라도 생산성이 낮은 몽골 초원에서 이를 이루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었을 것이다.

그는 평시에는 거의 누더기 수준의 옷을 입었으며, 일반 병사와 같은 식사를 했다는 것으로 보아 검약을 생활화 한 것 같으나,

국가의 재원이 지도자 한 사람이 아껴 쓴다고 마련되는 것은 아니고,

흔한 가축들을 팔아 마련한다 해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약탈밖에는 답이 없는데, 국내는 법으로 금지시켰으니, 결국 국가 단위의 약탈이 주 수입원이었을 것이다.

  

징기스칸은 하느님이 문명국인 중국의 사치와 오만에 실증이 나, 자신과 같은 야만인에게 그들을 지배할 운명을 부여했다고 말했다 하는데,

여기서 하느님은 물론 기독교의 하느님과 관계가 없는 텡그리를 말하고 중국도 금나라를 말하는 것이었겠지만,

고조선과 부여에서도 나타나는 북방민족 공통의 최고신인 이 놈의 텡그리가 하필 그때 나타나 왜 몽골 놈들한테만 미소를 보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당시 몽골의 성공을 보면 그런 마음이 들만도 했을 것이다.

그는 부하들에게,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은 적을 추격해 쓰러뜨리고, 그들의 소유물을 독차지하여 그 여자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 것이고

그들의 말을 빼앗아 타고 다니고 그 여자들의 몸을 침대와 베개 삼아 노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했다 하는데...

...진짜로 징기스칸이 이 말을 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참으로 적나라하고 야만적인 그러나 솔직한 수컷의 고백이 아닐 수 없으나,

우상과 같은 징기스칸에게 언제라도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던  철없고 무식한 애들이 이 따위 소리를 듣고,

뭔 짓을 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모골이 송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지들이야 즐거웠을지는 몰라도 우리나라처럼 당하는 입장에서는 피눈물이 날 일이었다.​​

 

`우리는 똑같이 희생하고 똑같이 부를 나누어 갖소.

나는 사치를 싫어하고 절제를 존중하오.

나의 소명이 중요했기에 나에게 주어진 의무도 무거웠소.

나와 나의 부하들은 늘 원칙에서 일치를 보며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굳게 결합되어 있소.

내가 사라진 뒤에도 세상에는 위대한 이름이 남게 될 것이오.

세상에는 왕들이 많이 있소. 그들은 내 이야기를 할 거요!”

징기스칸이 남긴 말이라 하는데..

모두가 공평하게 잘먹고 잘살자...약탈해서...이런 이야기이다.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냄새가 나기도 하는 이 징기스칸의 이상은

당대의 몽골 젊은이들을 흥분시켰고, 최강 군대의 일원으로 성장하게 했을 것이다.

    

징기스칸은, 최우가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서방을 설치하여 문신 우대정책을 펴던 1227년,

서하  2차 공략전을 친정하던 도중, 

말이 뭔가에 놀라는 바람에, 말 위에서 태어난다는 몽골족의 수장답지 않게 낙마하였고,

개방성 골절을 입었는지 그 상처가 악화되어 승리를 목전에 두고 죽어버렸다는데,

죽으면서 애꿎은 서하에 풀 한포기 남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 유언은 철저히 집행되었다 한다...음... 

그가 생전에 정복하고 통치한 땅은 후세의 자식들이 통치한 지역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작은 감이 있으나,

몽골을 통합하여 군제를 정비하고, 야삭을 남겨 법령의 기초를 마련하는 등, 그의 훌륭한 통치가 없었다면,

징기스칸의 뒤를 이은 귀공자들은 정복을 확대하기는 커녕 내분에 휩싸여 어느 놈의 칼에든 맞아 죽었을 것이고,

몽골족들도 목축과 도둑질을 겸업하는 조상들의 삶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징기스칸...징그럽기도 하고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고...참 생각할 게 많은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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