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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李完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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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잘 몰라도, 한국인이라면 잘 알만한 천하의 개쌍노무 역적새끼.

 

그 역적은 바로 이완용 (​)(1858년~1926년 본관 우봉, 자 경덕, 호 일당)이다. 이완용은 당시 을사늑약에 서명한 다섯인의 매국노인간들, 을사5적신의 한 사람이다.  사실 을사5적신이라면 천하의 개쌍노무 역적들인데, 이완용은 그중에서 특히나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는 국민과 나라를 팔아 먹은 최악의 매국노에 속한다.

 

이 양반의 생애를 알아 보기에는 잘 읽어봐 주지 않을 것으로 생각이 들어 요점만을 정리해서 올려 본다. 우선, 이 양반은 우봉 이씨의 이호석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똥구멍 찢어지도록 가난해서, 1867년 10세의 나이에 친척이자 예방승지에 있던 이호준의 양자로 입양되게 된다. 당시에는 입양이라고 해서 완전 피도 안섞인 사람에게 보내는 것이 아닌 같은 집안 사람중에서도 형이나 아우의 자식을 입양하는 것이 전통이였다. 

 

아무튼 이 양반이 친척이자 예방승지로 있던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형편이 조금 바뀌었고, 당시 이호준은 고종황제의 신임을 얻고 있어서, 이완용이 역시도 양부의 영향을 받았었다. 1882년 (고종 19)에 이 양반이 증광별시 문과에 급제하면서 정치계에 발을 디뎠다. 증광별시의 문과에 급제하고 그로부터 5년 후 규장각 대교에 임명됐고, 이후로 다양한 관직에 머무르면서, 자신의 세력을 키웠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완용은 친일파는 아니였고, 사실 친러에 가까운 사람이였다. 아마 사람들도 이 양반이 국민과 나라를 팔아먹을 역적새끼라는 걸 몰랐을 것이다.

 

이 양반의 정치 인생을 살펴보아하니, 이 양반이 미국에 건너가 미국 공사관의 역할을 하면서 미국물을 먹었는지 조금 개화파로 바뀌었는데, 세상은 그런 그를 받아주지 않았고 그저 조선 왕실은 낡은 전통과 유교사상만을 고집했다. 

이완용과 주미 공사관 관원들을 중심으로 정동구락부 모임에 가담하여 구미인을 중심으로 친러파 세력이 결집되었으며, 정동파 수장으로 친일과 친청 세력을 견제했다. 

 

그렇다 이 양반도 사실은 친일을 견제했다.

 

그런데 언제 부터, 친일파로 변절했는가?

 

이 양반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을 할때까지도 사실은 친일세력이 아니였다. 당시에는 조선에 러시아가 더 적극적이였기 때문에 친러를 이용했었다.

그런데 이 양반에게도 시련이 닥쳤으니, 바로 양부 이호준의 자연사로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그리고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고 고종황제의 명으로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되고,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미국은 일본과의 조선, 필리핀 등의 식민 지배를 허용한다는 가쓰라-레프트밀약을 체결한 상황이라 고종황제의 미국공사관 피신은 미국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오갈때 없는 비둘기 신세가 되버리자, 이때부터 이완용 천하의 개쌍놈은 친일파로 변절해 버렸다. 정말 나쁜 새끼네.

 

1905년, 학부 대신이 되었고, 같은 해 11월 18일 을사늑약 체결에 지지했고, 솔선하게 서명함으로서 을사5적신의 한사람으로 최악의 매국노라는 수식어가 붙게 됐다.

그의 적극성이 일본정부가 맘씨 고아보였는지, 이토 히로부미 (조선 초대 통감)의 관심을 봤고, 그해 12월, 의정대신서리, 외부대신 서리를 겸직했으며, 1907년 의정부 참정과 지 스스로 바꿨는지 모르겠지만 내각으로 바꾸고 스스로 내각 총리대신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을 받아 되었다. 

 

하... 많이도 해쳐먹었네.. 개새끼..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의 지시대로 고종황제를 추궁하고 양위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고종의 아들인 순종을 즉위했다. 이로써 순종이 대한제국의 2대 황제와 조선왕조의 27대 마지막 왕이 됐다.

당시 군중들도 이완용의 개같은 매국행위에 대해서 덕수궁 앞으로 모려가 이완용을 규탄했고, 이 양반의 집을 불태워 버렸다.

그런데, 이 양반이 아랑곳 하지 않았는지 이토의 주도대로 한일신협약 (정미7조약)에 지멋대로 서명하고 순종의 재가를 받았다. 이로써 국가의 3요소 뿐만 아니라 모든 조선에 관한 권리 등을 일본정부에 아무런 대가 없이 넘겨주고 말았다. 1909년 7월 이완용이 지 멋대로 혼자 기유각서를 맺어 대한제국의 사법권까지 넘겨줬다.

 

씨발, 정말 나쁜 새끼네

 

뭐.. 이토 히로부미가 중국에서 안중군 의사에게 피살되고, 이완용 역시 이재명의 칼에 맞아 오른쪽 폐가 만신창이가 되긴 했지만 치료는 잘 받았는지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이래저래 일본정부가 맘씨 좋은 이완용에게 백작의 지위를 내려줬고, 3.1운동 등의 비판한 공로로 남작의 지위를 다시 내리는 등으로 지하고 지가족들이랑 잘먹고 잘싸고 하다가 1926년 69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하지만, 국민과 나라를 팔아 쳐먹은 이 천하의 개같은 놈이 감히 지금의 대한민국 땅에 잘 누워서 지낸다고 하면 망상이겠죠?

 

​그는 살아 생전에 자신의 무덤 위치도 이름좀 났다면 풍수학자들을 동원해서 무덤의 위치를 정했다고 하는데,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 선인봉의 첩첩산중을 영면의 장소로 정했다고 한다. 

물론 이 양반도 지가 잘못한 건 알았는지 무덤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개의 묘를 사용했고, 도굴범들을 막기 위해 무덤의 위치를 숨겼다고 하지만, 그가 죽고 얼마 후에는 1926년 3월 3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강경에서 부터 낭산까지 도로를 개통하느라고 주민들을 공사에 동원하느라 지역주민들을 분개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리고 이완용의 무덤을 해치려고 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처벌을 받았다고 하고, 독립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완용의 무덤에 관해서 다시 수면위로 올랐는데, 이 양반이 사망하고 1979년 바로 53년 만에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데, 이는 더이상 세상에 이완용의 무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였다.

왜 그러는지 보았더니, 이완용의 증손자 이석형씨가 후손 4~5명과 함께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 1979년 4월 23일 이 양반의 무덤을 파서 관을 꺼내서 유골을 꺼내어 간이 화장을 하고 인근의 장암천에 뿌려 버리고 이완용의 무덤은 폐묘했다고 한다. 이때 조부모 이항구 부부의 묘도 같이 폐묘 했다고 한다.

 

매국노, 매국노 집안 등의 주변 손가락질에 우봉 이씨 집안도 참지 못해서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오래 둘수록 치욕만 남는다라는 이유로 증조부 이완용을 집안의 호적에서 말살 시켜 버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당시 묘지가 관리가 잘 되지 않았는지 인부들 조차도 작업시에 이 묘지가 천하의 개새끼의 묘지인지 몰랐었다고 하고, 무덤에서 관을 꺼냈을 때에는 석재 항아리 1개, 생시에 입었던 관복, 일생의 행적이 기록되었던 지석 등이 발견되었는데 유족들은 석재 항아리만 챙기고 인부들에게는 금니를 품삯으로 줬다고 한다.

 

현재는 해당 묘터는 채석장으로 변했고, 당시 관뚜껑은 인부였던 유종식씨가 바둑판으로 만들려고 하다가, 낭산면사무소 직원이 원광대에 알렸고, 당시 5만원을 건내고 사왔는데, 이완용의 먼 친척뻘이였던 역사학자 이병도 박사가 내려와 원광대 박물관장을 설득해 관 뚜껑을 태워버렸다고 한다. 아마도 이병도 박사도 이완용과는 친척뻘이지만, 괴롭긴 되게 괴로웠나 보다.

 

사람 인생이라는 것도 가지각색인데, 이완용이 처럼 살다 가면 몹시 허망할 것 같다. 특별하게 살아가는 것도 좋지만 남들과 맞춰 가면서 특별하게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물론 이 양반도 살다 보니 그렇게 됐겠지만, 그것이 오늘날 내려와 이 사람을 몹시 증오하며 심지어는 무덤까지 해치우고 또한 집안의 호적에서 말살시켜 버리기까지 하니... 

사람은 죽었지만, 자신은 이 땅에 편히 눕지 못하는 신세인 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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