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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애국가는 찬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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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의 간추린 역사, 애국가는 찬송가였다!

 

글 박용규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우리 애국가는 찬송가였다. 이 사실은 전혀 생소한 일이 아니다.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체로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 모르는 이들이 많은 것 같아 여기 소개한다. 우리 애국가는 1906년 윤치호가 역술한 찬미가 14장에 수록되어 있다.

 찬미가 14장에 있는 대로 현재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의 가사와 별 차이가 없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널리 불리던 애국적 찬양이 기독교 영역을 넘어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널리 불려졌다. 1948년 정식으로 애국가로 채택,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애국가는 그 나라의 정신과 문화를 대변한다. 윤치호 장로 역술 찬미가 초판은 1905년에 나왔으며, 1908년에 재판이 인쇄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기간은 대부흥운동기간이다. 이 기간 애국가는 기독교인들 사이에 널리 불려졌다. 이 기간은 우리 민족이 가장 어두운 시절을 통과하고 있을 때였다.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를 통해 일제에 대한 민족적 울분이 절정에 달하고 있을 때 기독교인들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나라 사랑을 애국적 신앙으로 승화시켰다. 지금의 애국가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당시 나라와 민족을 가슴에 두었던 의식있는 기독교인들 사이에 널리 불렸던 찬송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감격한다.

 기독교가 우리 민족과 사회와 정신에 얼마나 깊이 영향을 미쳤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시 애국가가 본래 가사대로 회복되어 우리 찬송가에 삽입하면 어떨까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면 또 종교 편향이니 하며 타 종교인들이 들고 일어날지 모르겠다. 아니면 기독교에서 유래된 애국가 가사를 아예 완전히 바꾸자고 타종교 사람들이 들고 일어날지 모르겠다.

 이제 국민의 노래가 된 애국가를 기독교의 찬송가로 축소시켜 불필요한 오해를 야기시킬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애국가를 부를 때마다 찬송을 부르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면 될 것 같다.

 그리고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다. 8.15 광복절 기념 예배와 3.1절 기념 예배를 드릴 때 이 애국가를 함께 부르며 한국 기독교가 우리 민족의 독립과 민족운동에 앞장서서 민족의 아픔을 방관하지 않고 겨레와 함께 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며 이 나라와 이 민족을 보호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어떨까!

 

* * *

 오늘 교회 주보에서 '최초의 애국가는 개신교 찬송가였다'는 주장의 토막글을 보았습니다. 사실 이전부터 제가 크리스천이라 어제오늘 들어왔던 이야기는 아니지만 올해가 광복 70주년이다보니 색다르게(?) 느껴지더군요. 현재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의 작곡가는 널리 알려진 상태이지만 애국가의 작사가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오리무중입니다. 어떤 이는 윤치호라고 하고, 어떤 이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라 하고...그렇지만 1910년 후반에 출판된 <<찬미가>>를 비롯, 일제 강점기 출판 애국가는 윤치호를 작사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다시 말하자면 윤치호 작사설에는 실증 사료가 많지만 안창호 선생 작사설에는 실증 자료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 그외 윤치호의 사촌 동생 윤치영의 말로는, 애국가 가사 앞부분은 정동 감리교회 담임 목사 최병헌 목사가 지었고, 후렴 부분을 윤치호가 지었다고 하고, 애국가의 원본을 윤치호가 지었으나 일부 가사를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바꾸었다고도 한다. 한편, 애국가는 본래 윤치호가 짓고 이후에 안창호가 일부 개사했다라는 이상한 소문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돌자, 김구 선생은 어떤 동지에게 '우리가 3.1운동을 태극기와 애국가로 했는데 누가 지었는가가 뭐가 문제인가'라며 '작사 및 작곡가의 성향보다 애국가에 담겨있는 정신이 중요하다' 하기도 했다 한다. 어쨌든 애국가의 작사가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애국가 작사가와 연관된 인물(애국가 작사가로 추정되는 인물)이 모두 기독교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맞다. 이는 초창기 애국가는 기독교 복음주의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결합된 산물이라는 증거이다. 작년 1월, 미국 에모리 대학 도서관에서 윤치호 역술 <<찬미가>>를 발견하신 혜문 스님께서는 "애국가가 기독교의 찬송가로 시작해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민족의 노래로 승화되는 과정은 작사가 규명에 주목을 요구하는 부분이다. 특히 윤치호 역술 찬미가(1908)의 보급은 애국가 보급 및 확산에 중요한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씀하셨는데 필자도 대개 동의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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